두 천재의 만남 : 래리가 세르게이를 만났을때
"지금은 이렇게 여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당시엔 정말 긴박하고 간절했어요. 우리는 평생 모아 둔 모든 재산을 정부에 빼앗긴 상태였습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아이의 미래와 제 꿈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 미하일 브린, 세르게이 브린의 아버지
러시아에서 유대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미하일(Mikhail Brin)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 미하일은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구소련에서 유대인이 물리학과 같은 기초과학이나 우주산업 같은 첨단과학을 공부하는 것은 엄격히 제한되는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미하일은 수학을 전공해야 했죠.
<출처: NASA홈페이지. 1957년 구소련의 인류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1960년대는 미국과 소련이 달 착륙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스푸트니크(SPUTNIK)의 시대'였습니다. 수학자로서 인정받던 미하일은 우주개발 관련 연구팀에서 일하고 싶었으나, 여전히 유대인에게 그와 같은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미하일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항상 고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77년 국제회의에 참석한 미하일은 외국에서 자유롭게 일하는 많은 동료 과학자들을 만나고, 마침내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로 마음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이기 때문에 구소련에서 불이익만 받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유대인에게는 비교적 자유롭게 이민이 허용되었거든요. 물론 러시아를 떠나기 전 개인의 모든 사유재산은 정부에 귀속된다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미하일과 그의 아내 유지니아 브린(Yevgenia Brin)은 이민 신청 직후 직장에서 해고되었으며,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기까지 수년 동안 경제적으로 매우 힘겨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출처: Jewish Historical Society of Greater Washington, 세르게이 브린의 가족>
거의 모든 재산을 구소련에 남겨두고 미국에 왔지만, 그들에겐 탁월한 지식과 어려움을 헤쳐나간 소중한 경험, 그리고 사랑스러운 6살짜리 아들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 1973~)이 함께 있었습니다. 메릴랜드에 정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하일은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게 되었고, 아내는 나사(NASA)의 과학자가 되었습니다.
다행히 아들 세르게이는 새로운 교육에 매우 잘 적응하고 있었습니다. 메릴랜드 아델피(Adelphi)에 위치한 몬테소리 초등학교를 다녔고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으며, 명석한 부모의 영향으로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대학에서 컴퓨터공학과 수학을 전공한 세르게이는 19세의 이른 나이에 메릴랜드 대학을 졸업했으며, 국비장학생으로 스탠퍼드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스탠퍼드에서는 모든 자격시험을 두 달 만에 통과할 정도로 천재성을 보이며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습니다.
박사 2년차가 된 세르게이는 신입생들의 캠퍼스 투어 가이드를 맡게 되었는데, 여기서 동갑내기며 세르게이처럼 유대인인 또 한 명의 천재, 래리 페이지(Larry Page, 1973~)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첫인상이 좋지는 않았어요. 어떤 주제에 관해 얘기할 때면 세르게이는 대단히 공격적이어서 우린 많은 언쟁을 했야 했어요. 저 역시 지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 래리 페이지
1995년 여름, 스탠퍼드의 날씨는 무더웠지만, 습도가 그리 높지는 않았습니다. 22살의 래리 페이지(Larry Page. 1973~)는 스탠퍼드 대학의 컴퓨터 공학 박사과정에 입학을 고려하던 중, 학교 측의 캠퍼스 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래리가 속한 그룹의 가이드로는 스탠퍼드의 수학천재로 유명하고,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는 세르게이 브린(Sergei Brin. 1973~)이 함께 하게 되었죠. 동갑내기에다가 공통된 관심사가 많은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흥미를 느꼈으나, 사사건건 미묘한 의견 충돌로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았습니다. 일교차가 심한 스탠퍼드의 피할 곳 없는 뜨거운 여름 햇살 역시 첫 만남에 별로 유쾌하지 않은 장애물이었습니다. 결국,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끝이 없는 논쟁을 거듭하고 말았습니다.
래리는 좋은 가정환경에서 자라났습니다. 아버지는 미시간 주립 대학의 교수이자 컴퓨터 인공지능 분야의 명망 있는 권위자였으며, 어머니 역시 같은 대학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곳곳에 컴퓨터와 과학 관련 잡지가 널려있던 집안에서 태어난 래리는, 몬테소리식 교육법을 실천하는 학교에 다니며 레고와 전동공구에 관심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1979년 6살에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한 래리는 초등학교 시절, 숙제를 컴퓨터로 작성하고 제출한 첫 번째 학생이었으며 발명가 '테슬라'를 동경하며 꿈을 키웠습니다.
미시건 대학교에 진학해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래리는 부모님처럼 교수가 되기를 희망했으나, 스탠퍼드에서 세르게이 브린을 만나 새로운 웹세상을 만드는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출처 : abc.com>
세르게이와 래리, 둘은 모두 컴퓨터에 익숙하고 토론을 중시하는, 학문적이고 근대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만남은 치열한 논쟁으로 다소 어색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느새 둘은 스탠퍼드 내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